양명학의 이해 Up
2. 사상적 배경
절대적인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정치·군사 제도를 확립하였으며, 또한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아 사상적 통일을 꾀하고 四書五經을 내용으로 한 엄격히 규정된 형식의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였다. 이 결과 明代의 학풍은 학문을 권세와 利欲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삼았으며 진지한 학문적 탐구심을 결여된 형식적 理의 추구나 맹목적 실천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초래하였다.
3. 왕양명의 문제 의식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왕양명은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첫째, 유학의 목적과 방법을 다시 정립하고자 하였다.
양명은 학문이란 聖人이 되기 위한 것이고 성인의 학문은 心學이라고 규정하였다.
둘째, 국내의 무질서와 갈등,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질서와 평화를 지키고자 함.
양명학의 이론
★격물치지, 심즉리설, 치양지설, 지행합일설.
① 격물치지 : 본래 격물치지라는 말은 중국 사서(四書)의 하나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격물(格物) ·치지(致知)를 놓고 여러 해석이 나왔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학파가 주자학파와 양명학파이다. 주희는 격물치지를 “모든 사물은 반드시 표리(表裏)·정조(精粗)가 있다. 풀 한 포기, 나무 하나에도 모두 지리(至理)가 포함되었다.” 고 하였다. 즉 사물의 이치를 깊이 궁리하고 탐구하면 앎에 이른다[致知]고 하는, 이른바 성즉리설(性卽理說)을 확립하였다. 왕양명이 20세 되던 해에 주자의 해석을 따라 집 앞의 대나무의 이치를 궁리하기 위해 3일 밤낮을 연구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 다시 7일 밤낮을 대나무 앞에서 대나무의 이치를 궁구했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로부터 3년 후 왕양명은 격물치지의 의미를 이해하여 “천하의 사물은 본래 궁지(窮至)할 수 없는 것이고 격물의 수행은 단지 자기의 신심(身心)에서 하는 것이라 깨닫고, 결코 성인은 누구나 될 수 있으니 곧 스스로 감당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가 37세 되던 해 용장에서 ”성인의 도는 나의 성(性)으로 자족(自足)하다. 지난 번 리(理)를 사물에서 찾은 것은 착오였다“고 깨달은 것은 ‘심즉리’에 근거한 것이라 하겠다.
② 심즉리설 : 심즉리(心卽理) 는 육상산이 처음 주장한 말이지만 왕양명에서 그 사상을 일관하는 원리가 되었다. “理란 모두 마음속에 있으니, 마음이 곧 理이다(心卽理也). 이 마음에…(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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